[마산시보]가곡 전수관 개관을 앞두고 만난 조순자 명인

2009. 4. 24. 13:05언론에 비친 가곡전수관

“마산을 국악의 종가로 만들거예요” 

가곡 전수관 개관을 앞두고 만난
조순자 명인(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 보유자)


 “너무 기뻐요, 저는. 아름다운 우리 노래를 마음껏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곳이 생겼는데 얼마나 좋아요.”그의 집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까지 붙어 다니던 습도 높은 열기 그 불쾌함이 그를 만나고 는 맥없이 사라졌다. 잿빛 치마에 붉은 저고리를 곱게 입은 옷맵시보다 화사한 표정에 맑은 목소리가 더 곱고, 미리 마련해둔 차가운 차를 내미는 배려가 살갑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 보유자 조순자(63세) 명인. 그가 중심이 되어 가곡을 잇고 발전시켜 나갈 공간인 가곡 전수관이 최근 공사를 마치고 개관을 앞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가곡 전수관이 마산에, 무학산 자락에 들어선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민들에게, 마산시민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먼저예요. 귀한 세금으로 지은 전수관이잖아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기쁜 마음 간직할 거예요.”
 그가 마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마산이 고향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부터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되던 해니까 올해로 37년째 마산에서 살고 있다. “가곡은 예와 악, 질서와 화합의 음악이에요. 마산은 민주화의 도시잖아요.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이 없는 그런 곳이잖아요. 바로 그런 점에서 마산과 가곡이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해요.” 전국을, 세계로 무대로 활동하는 그가 가곡 전수관이 마산에 지어져야 한다고 여겼던 이유다.

  그가 가곡을 처음 접한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서울 중앙방송국(KBS의 전신)에서 국악연구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해 뽑혔다. 당시에도 방송국하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거니와 어려서 노래잘하고 춤 잘 추는 딸아이를 아버지가 적극 추천 해주었다. 그렇게 국악연구생으로 시작해 나라의 최고의 명인 명창들에게 가무악을 두루 배우게 된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가곡 전공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가곡은 누구나 기초적으로 다 배워야 했어요. 가곡에는 우리나라 말의 발음법, 호흡법 그리고 가장 편안한 발성법이 무엇인가를 기본적으로 알게 해주는 그런 요소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가곡을 배우고 나면 그 다음에 판소리도 하고 민요도 부르고 또 악기도 하고 춤도 배우고 했습니다.”
 
 그가 가곡 주자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스물 두 살 때였다. 당시 조 명인의 스승은 조선후기의 가격 박효관 안민영의 계보를 잇는 이주환 선생이었다. “1964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국립국악원이 생기고 처음으로 일본공연을 할 때였어요, 거기서 제가 가사 ‘춘면곡’을 독창하고, 영광스럽게도 선생님과 함께 ‘태평가’이중창을 했지요.  그때 제 나이 갓 스물 두 살 적인데 파격적인 대우였죠.”

 일본 공연 이후로 가곡 하면 조순자로 통할만큼 국내외 수많은 무대에 가곡 주자로 서게된다.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공연에서도 아름다운 한국의 음악으로 극찬을 받았다. 그런 그도 가곡이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가무악을 전부 다할 수 없어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더니 끝에 가곡이 남았다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느려서 싫었어요. 그런데 가곡은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이 넉넉해지는 거예요. 큰일 날 것도 없고, 너무 밉거나 너무 보고 싶어 죽겠지도 않더라구요.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생겨요. 이 음악 속에는 그런 것이 있어요. 한없이 옹색한 마음도 이 노래를 부르면 굉장히 편안해지고 넓어져요. 그래서 지금껏 가곡을 하고 이런 가곡을 나누어 드리고 싶어서 늘 애를 씁니다. 가곡을 하면 그냥 다 편안해서 전쟁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가곡의 매력에 반해 한 평생을 가곡과 함께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가곡이 화석화돼서 박물관 음악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두렵다고도 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계승하고도 발전이다.  “제자들에게 그래요. 가곡은 얼마든지 창의적이고 민주적인 음악이다. 너만의 소리를 만들어라. 글은 써야 하고 옷은 입어야하고 집은 살아야 하듯이 가곡도 불리어져야 한다. 기본을 지키면서 얼마든지 시대에 맞게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도록 발전시킬 수 있다고.”
 
 전수관이 개관하면 조 명인은 할일이 많다. 새로 생긴 전수관에 공연장도, 이를 운영할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아 부족하지만 의미 있는 첫 발을 내딛었다고 생각한다.  “마산을, 경남을 국악의 종가로, 국악교육의 본산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의무감이 들어요. 또 그렇게 해야하구요. 도내에는 국악을 가르치는 곳이 없어요. 사람을 키우는 일이 우선이죠. 가곡을 담을 수 있는 좋은 그릇, 기능인이 아닌 정신을 이을 수 있는 좋은 제자를 키우는 일에 생을 다 바칠 거예요.”
 
 그가 입고 있던 붉은 색 저고리 때문일까. 예순 셋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곱던 얼굴색 때문일까. 나오는 길에 해사한 매화꽃 한 떨기가 머릿속에 들어찬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었던 시조 한수가 돌아오는 길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 샤
  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조국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