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산조춤 유일한 계승자 김온경

2010. 12. 17. 10:27언론에 비친 가곡전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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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그들]산조춤 유일한 계승자 김온경

피할 수 없었다. 도망치고 도망쳐도 달라붙는 운명. 왜 하필 춤인가. 아버지는 부산의 문화딜레탕트였다. 그 아버지 때문에 딸이 있었다. 김온경(69)은 아버지의 극성스러운 문화사랑을 호흡하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춤과 소리를 강요받았다. 가혹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 문중의 반대를 물리치고 기생춤을 배우다

아버지 김동민은 양산 동면 대지주의 외아들이었다.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를 졸업했지만 대사헌을 지낸 부친의 얼을 잇기보다 풍류에 빠졌다. 할아버지 김순익은 낙동강 배에 쌀을 실어 매매하는 미곡상이었다. 아들 김동민이 가업을 이어야 했지만 ‘동경유학생’은 예인들 모셔다 소리듣고 춤을 배웠다. 동래권번과 한량들의 사랑방에 출입하며 멋쟁이 소릴 듣고, 6·25전쟁 직전 부산 최초로 민속무용연구소를 세워 문화를 공급했다. 부산에서 처음 권투를 배웠고 보성고보 학교대표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다. 일제강점기에 부산 부의원(현 시의원)을 지낸 과거가 부끄러워 그저 우리 전통춤 되살리는 일에 천착했던 것이다.

“복잡한 세상일이 싫으셨던 겁니다. 나라 잃은 한을 달래기 위해 문화계몽 운동인 국악부흥을 주창하셨습니다.” 당시 광대들 사이에선 ‘부산에 가면 김동민 집에 가서 놀아야 돈과 밥을 주고 경주에선 최부잣집에 가야 그럴 수 있다’는 말이 돌 정도.

5남매 중 맏이인 ‘온경 애기씨’는 독과외로 풍류를 익혔다. 당시 한국춤은 권번에서 기녀들이 추었다. 일반인이 추면 금방 기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큰일’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문중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온경을 한국춤에 입문시켰다. ‘한국춤=부산’이라는 등식을 이룬 주인공이니 그럴 만도 했다.

1939년부터 동래 권번에서 가야금과 춤을 가르친 무안출신 재인 강태홍(1893~1957)은 이들의 키워드였다. 권번에서 기생들과 어울리다 알게된 광대지만 아버지는 거리낌없이 집으로 불러들였다. 강태홍은 11살 애기씨에게 춤을, 마님께 가야금을 지도했다. 또한 대청마루에서 아버지가 강태홍에게 청하면 그 앞에서 춤과 소리를 하고 ‘개런티’를 받았다. 그때 강태홍은 아편중독자였다. 교습비와 개런티로 받은 돈의 용처는 뻔했다.

강태홍이 애기씨를 가르치고 집 문을 나서면 아버지가 애기씨 트레이너가 되어 그날 배운 굿거리춤, 산조춤, 승무 등을 복습시켰다. 춤을 시원치 않게 추면 매로 다스리며 훈련시켰다. 딸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춤추기만 강요했다. 아버지는 5남매에게 모두 강태홍의 춤을 배우도록 지시했지만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결국 맏딸 김온경만 남곤 했다.

“놀러가지 못하게 집에 잡아두고 춤만 추라고 하셨습니다. 하루종일 춤, 춤 하다보니 진저리치도록 춤이 싫어지더군요. 아버지께서 춤 시범을 보이면 따라하는 맛에 추었을 텐데, 저에게 연습을 강요하면서도 춤을 추지 않으셨죠. 양반은 남이 보는 데서 춤추면 안되는지….”

아버지는 온경의 춤에만 돈을 지출했다. 젊은 딸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입고 싶지만 아버지가 사주는 구제품이 전부였다. 새 옷을 입고 싶으면 어머니의 비자금으로 맞춘 옷을 친구 집에 맡긴 후 아버지 몰래 입고 다녔다. 당시 부산에서 기생 아닌 일반인으로 한국춤을 배운 이는 세사람뿐. 김온경, 동인병원 둘째딸, 음식점 주인 딸이 배웠는데, 김온경만 남았다.

# 춤추지 않기 위해 결혼 - 남편은 동생 김기수 전 검찰총장 친구

애기씨는 13살 때 춤발표회를 가질 만큼 부친의 혹독한 춤훈련을 견뎠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부친으로부터 춤 유산을 받은 그는 다시 자신의 큰 딸에게 춤물림한 것으로 모자라 조카까지 4대에 걸쳐 고단한 예술가의 삶을 물려주었다.

“춤이 있어 행복했고, 춤 때문에 아픔과 고통도 많았습니다. 1948년부터 춤을 배웠으니 이제 60년째 춤과 살아온 셈인데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회한이 있습니다. 춤 3대를 잇기 위해 운명처럼 불행의 씨앗을 받은 딸 여숙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김온경은 25세에 결혼해 3남매를 두었다. 부산 토박이지만 남편따라 10년동안 서울에 살며 윤여숙(44·한국무용가), 여정(41·패션디자이너)·여찬(37·회사원)을 낳았다.

무조건 춤만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결혼. 아버지는 결혼을 말렸지만 남동생 김기수(66·전 검찰총장)과 고려대 법대를 같이 다닌 국방부 사무관과 결혼했다. 춤에 진저리가 난 터라 아이 낳고 살림만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운명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꾸 아팠다. 위암 말기 상태로 위를 거의 모두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 잘 생긴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서울과는 연이 맞지 않는가보다’ 풍수지리를 탓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을 향했다.

부산으로 돌아가자 용기가 생겼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30대 중반에 이화여대 대학원 한국무용 전공. 부친의 제자였던 김매자 교수를 사사했다. 춤의 운명을 다시 몸에 붙이고 부산여대(현 신라대) 무용과 강사로 새출발했다.

“춤에서 도망치고 싶어 결혼했는데, 이혼 후 다시 춤을 찾으면서 건강도 되찾고 내 영혼도 숨을 쉬게 됐습니다. 무슨 팔자인지… 아버지는 지난 99년 89세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아버지께 무조건 복종만 하고 살아서인지 ‘좀 더 잘 해드릴 걸’ 하는 후회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2005년에 89세로 작고하셨고요.”

아버지의 강압으로 춤을 배우는 대신 대학입시는 춤과 관련되지 않은 학과를 택하고 싶었다. 마침 대학에 체육과는 있었지만 무용과가 없을 때여서 국문과를 지원했다. 6·25전쟁 때는 부산에 있던 연세대 분교에 다녔다. 그러나 연대가 서울로 되돌아간 후 ‘춤추라’는 아버지 고집 때문에 곧바로 서울유학을 강행할 수 없었고, 뜸 들이다 덕성여대 국문과를 다닐 수 있었다.

# 강태홍류 산조의 유일한 계승자

부산은 남성춤이 강세다. 특히 덧뵈기춤이 압권인데, 무용가가 추는 춤이 아니고 일반인이 출 수 있는 춤이어서 더욱 멋지다. 김온경은 강태홍에게 버선발로 추는 기방춤을 배우고, 부산 동래에서 문장원에게 덧뵈기춤을 배웠다.

그러나 이젠 한국춤의 메카인 부산에서도 한국춤이 힘을 잃고 있다. 사회적 변화로 생업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풍류꾼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일까. 기녀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기방춤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까.

“옛말이지만, 기방에선 ‘박색은 학습기생, 미인은 화초기생’이라는 말이 돌듯 예쁘기만 한 기녀보다 소리 잘하고 춤 잘추는 박색 기녀가 돈을 더 잘 벌었습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에게 옛 춤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뿐인가. 궁중무용도 전수되지 않고 사라진 춤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김온경은 85년부터 ‘동래고무’를 권번출신 김해월과 석주향에게 사사하고 93년 ‘동래고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지만, 춤미련이 많다. 당시 교방춤인 ‘동래고무’만 배우는 것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더 많은 춤을 배우지 못해 후회막급이다. 동래검무도 배우고 싶었지만, 두 스승이 모두 세상을 떠나 계승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강태홍에게 사사한 기방춤을 제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강태홍에게 굿거리춤, 입춤, 승무, 산조춤, 수건춤, 화랑무 등을 배웠다. 그중 명작무는 산조춤뿐. 살풀이춤이나 승무는 다른 사람도 추지만 강태홍류 산조 연주로만 출 수 있는 춤이 바로 산조춤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온경의 산조는 강태홍이 김온경에게만 사사한 춤이어서 의미가 각별하다. “제 유일한 스승은 강태홍 선생이십니다. 강태홍류 춤은 가야금 반주에만 맞추기 때문에 박자타기가 까다롭죠. 그런데도 악기없이 구음으로 ‘재쟁쟁, 쟁쟁…’ 소리내며 가르치셨어요.”

요즘 부쩍 스승과 아버지 생각이 절실하다고 했다. 사라지는 우리 춤을 보존해야 한다며 회초리들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그립다고 했다. “아버지께선 일제강점기의 울분을 기방에서 풀며 부러운 세월 보내셨지만, 사실 전통 지킴이로 부산지역의 춤활성화를 이루며 세상나들이 값을 하셨습니다. 선친의 유산이요? 아버지께 매맞아가며 춤을 배우고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김온경, 바로 나예요.”

김온경, 좋아서 춤춘게 아니다. 어릴 때는 참을성 많아 추었고 여자가 되고선 삶의 치유책으로 추었다. 그리고 이젠 아버지의 ‘유산’으로 남아 옛춤을 지키고 있다.

〈부산에서/ 유인화 선임기자 rhew@kyunghyang.com〉

〈사진 이상훈기자 doolee@kyunghyang.com〉

〈김온경 약력〉

부산 초량에서 1938년 5남매 중 맏딸로 출생

1961년 덕성여대 국문과 졸업

1979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

1987년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과정 이수

1993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지정

주요 안무작 ‘학바위’ ‘삶의 집념’ ‘오작교’ ‘산절로 나도절로’ ‘날개’ ‘아름넋’ ‘광수무’ 등

1995년 동래 한량춤 발굴·재연

수상 제39회 부산광역시 문화상(1996), 제3회 신라학술상(2001),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표창장(2003), 제5회 부산예술상(2006) 등

저서 ‘경남가면무의 미적연구’ ‘한국민속무용연구’ ‘부산·경남 향토무용총론’ ‘동래고무총람’ 등

▲ 아버지 추강 김동민은

1994년 생전 마지막 굿거리 춤을 추는 추강 김동민.
추강 김동민(1910~99)은 한국의 디아길레프였다. 유럽 발레의 부흥사 디아길레프는 무용수들을 육성하고 명작발레를 만들어 발레의 르네상스를 이룬 주인공이다. 김동민도 1950년 부산 최초로 민속무용연구소(몇년후 경남국악원으로 개칭)를 개설하고 좋은 무용선생들을 수소문해 꿈나무들을 가르쳤다. 당시 1기 연구생은 남승막, 양정화, 심지영(본명 심옥자) 등이었고 김매자, 이영희 등이 뒤를 이었다. 추강은 61년부터 한국국악협회 부산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옛춤을 고증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동래야류 수영야류, 통영오광대 등 부산 경남지역에 전해지는 춤은 거의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체계화됐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 있던 이왕직아악부가 부산으로 피란갔을 때는 토성동 자신의 집에 차린 민속무용연구소에서 업무를 보도록 돕기도 했다. 그후 아악부가 용두산 공원으로 옮기면서 ‘국립국악원’ 현판을 올렸고, 추강은 당시 남성 한국무용가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고 김보남과 김천흥을 초빙해 무용강습회를 열었다. 52년 부산극장에서 무용극 ‘춘향전’을 제작해 공연했고, 53년에는 자신이 안무한 무용작품 ‘황창랑’ 무대에 성경린을 해설자로, 김천흥을 해금반주자로 초청했다. 94년에는 ‘김온경의 춤 4代展’에서 굿거리춤을 직접 추며 부산 남성춤의 백미를 과시하기도 했다. 부산시의회 의원, 국제양조장 경영, 동아조선주식회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지만 국악협회 지부장, 부산시 문화재위원 등의 직함이 그에겐 더 잘 어울렸다.



# 동래고무?

1986년 현 기능보유자인 김온경(金溫慶)이 발굴, 93년 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

고려 초기 여악(女樂)을 관장한 교방청(敎坊廳) 기녀들이 추었던 향악정재인 무고(舞鼓)가 동래감영의 교방으로 전래되면서 동래고무가 됐다. 진주검무·진주포구락무·승전무 등과 함께 교방무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다.

입력 : 2007-06-07 09: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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