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탄]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2009.04.21 18:04왕초보 노래배우기


2005년 새해가 밝았다. ‘뒤 북 치는 일’이지만 지난 해를 돌아보기로 한다. 지난 해는 영송당 선생님의 갑년이기도 했고, 영송헌에는 참으로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서울 전수관이 문을 열었고, 영송당 선생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가곡 발표회가 열렸고, 더욱이 연말에는 선생님의 제자 세 분-이정희, 이경원, 권순자 선생님의 <이수자 발표회>도 있었다. 그리고 또하나, <왕초보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결국 굵직한 사건 몇으로 정리되고 말았지만, 그 굽이굽이마다 곡절이 많기도 했다.

나는 우연히 선생님께서 제자의 병을 애통하시며 눈물 지으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깊이 슬퍼하셔서 도리어 선생님께서 병을 얻으시지나 않을까 걱정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그 얼마 뒤 선생님께서 많이 편찮으셨다. 전수관에 도착하기 1시간 전에 전화통화할 때 맑고 높은 음성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전수관에 도착하니 꼼짝을 못하고 누워 계셨던 것이다. 평소에 건강하셨던 분이라 더욱 걱정되었다. 바로 회복하셨고, 선생님의 건강은 아주 양호하신 편이란다. 정말로 다행이다. 새해에는 또 어떤 일들로 영송헌이 북적거릴지 마냥 설렌다.
선생님! 앞으로도 늘 건강하고 다복하시길 빕니다.


초발심으로 돌아가서

한동안 <왕초보 시리즈>를 쓰지 못했다. 이유와 핑계들이 많긴 하다. 말하지 않으련다. 대신에 내가 <왕초보>를 쓰리라 마음먹었던 그 때의 정열을 떠올리며, 나 스스로에게서 용기와 힘을 되살려보고 싶다.
지난 해 5월 환계락 <사랑을>을 배우면서 이난향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송당 선생님께서는 이 노래를 이난향 선생님을 찾아가 직접 배우셨단다. <사랑을>은 이난향 선생님의 사랑과 아주 일치하는 노래라 하셨다.

사랑을 찬찬 동여매서 짊어지고,
태산준령을 넘어간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쯤 했으면 버리라고 하건만,
나는 가다가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다

사람들이 버리라 한 것도, 화자가 버리지 않겠다 한 것도 물론 사랑이다. 이난향 선생님은 한참 인기절정일 때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동여매고 짊어지기 위해 많은 것을 내던졌다. 이난향 선생님께서 사랑을 짊어지고 넘어간 태산준령은 다름아닌 가난한 살림과 눈먼 시어머니였다. 선생님께선 이 태산준령을 ‘허위허위 넘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험난한 고개를 넘어 '행복'이란 땅에 도달하셨다. 시어머니의 눈이 밝아지고, 남선생님과 다복하게 해로하셨으니 말이다.
(이난향 선생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홈피-선생님 소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난향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온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전류를 느꼈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이난향 선생님의 사랑과 삶을 내내 생각했다. 그 사랑이, 그 지극함이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생에서, 사람 사이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나의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누군가 그것을 알고, 느끼고, 말함으로써 이 세상에 알려지고 전해졌던 것이었다.

문학을 하는 나로서는, 문학의 가치를 거듭 느꼈다. 그러면서 영송당 선생님의 일도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내가 하자!> 그 때의 욕망과 열정은 정말로 청년이었다. 아무 두려움 없는…
내가 영송당 선생님께 선생님과의 일들을, 선생님에 대한 내 경험을 기록하겠노라고 말씀 드렸을 때 선생님께서는 무척 좋아하셨다. 그 뿐이 아니었다. 실제로 글이 홈피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접속했고, 더러는 <왕초보>를 인용하는 사람도, 더러는 나-왕초보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전수관에서, 연주회에서, 나는 종종 선생님의 제자들을 만나면 서슴없이 “제가 왕초보예요.”라고 나를 소개한다. <왕초보>로서 나는 기뻤고 신이 났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자 <왕초보>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의식되었다. 그러면서부터 나는 불편해지기 시작되었다. 아무 부담없이 했던 ‘강의노트’, ‘수업후기’ 같은 식의 글쓰기가 민망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더 잘 써보겠다는’ 아주 건강한 욕망도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날 옭아매고 주춤거리게 했다. 애초에 뻔뻔하기로 작정하고, <왕초보>라고 타이틀을 달지 않았던가?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고전시가를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시 뻔뻔하게 외쳐본다. 왕초보다운의 패기를 잃지말자!


굴원을 위한 노래, <초강>

<초강>은 굴원을 위한 노래이다. 자기 신념에 철저했던 사람이란 점에서 이난향과 굴원은 닮아있다. 그리고 그 신념의 중심에는 자신의 안락이 아니라 모두의 안락을 위함이라는 선한 지향성이 담겨 있다. 굴원과 이난향의 이야기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느껴지는 감동은 바로 거기에서 연원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노래를 배울 당시만 해도 나는 ‘굴원’에 대해 잘 몰랐다. <왕초보>를 쓰기 위해 ‘굴원’을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비록 얕은 수준의 정보지만 인터넷에 올라있는 ‘굴원’에 대한 정보를 짜깁기하여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굴원은 기원전 340-278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오늘날까지 중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초사(楚辭)라는 중국의 서사시 장르를 만들어 낸 그는 정신사적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굴원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비통히 여겨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린 "애국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던 굴원은 치란(治亂)에 밝아 초나라 회왕의 신임을 받았다. 굴원이 회왕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헌령(憲令)을 기초하고 있었는데, 굴원과 왕의 은총을 다투던 상관대부 근상(勤常)이 그걸 가로채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근상은 이에 굴원을 회왕에게 참소하였고, 현명치 못한 회왕은 이로써 굴원을 내친다. 조정서 쫓겨난 굴원은 머리칼을 풀어 흐트러뜨린 채 장강(長江) 주변을 방황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때 굴원은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소(離騷)>와 <어부사(漁夫辭)>가 그것이다.


비운의 삶을 산 굴원

굴원은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친제파였다. 당시 초나라는 굴원의 반대파인 친진파가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 친진 세력들은 진나라의 장의가 6백리의 땅을 베어 주겠다는 미끼에 속아 제나라와 친교를 끊은 후 끊임없이 진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에 초나라가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회왕은 다시 굴원을 불러들여 다시 등용하려고 하였다. 굴원은 오직 조국 초나라에 공헌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도인 영으로 돌아왔으나, 재차 녹상의 참소를 입어 강남지방으로 추방되는 비운을 맞는다.
경양왕 19년(B.C. 280) 초나라는 지금까지의 친진 정책에서 반진 정책을 펴 여러 나라와 함께 반진 동맹을 재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진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북(漢北)과 상용(上庸)의 땅을 빼앗고 다음해에는 또 서릉(西陵)을 빼앗았다. 그 후 진나라는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키고 초나라는 진성(陳城, 하남성)으로 후퇴하였고 다시 초나라의 무(巫)와 금중을 점령하니 이곳은 초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조국의 앞날에 희망이 없음을 한탄한 나머지 분연히 시 <애영>과 <회사부(懷沙賦)>를 짓고는, 음력 5월 5일 돌을 품고 멱라수(호남성 상수의 지류)에 몸을 던져 순국(殉國)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굴원을 죽음을 알게된 백성들은 굴원의 시신을 물고기들이 뜯어먹을까봐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에게 밥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굴원이 죽은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은 그를 추모하는 제일(祭日)로 정해져 있다. 매년 이날이 되면 중국의 강남지방 사람들은 뱃머리에 용의 머리를 장식한 용선(龍船)의 경주를 성대히 벌이고, 갈대잎으로 싼 송편을 멱라수 물고기에게 던져 주는데, 이는 초나라 사람들이 물속에 잠긴 굴원이 고기에게 뜯어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했던 일을 상징화한 놀이라고 하겠다.

초장-초강 어부들아
이장-고기 낚아 삶지마라
삼장-굴삼려 충혼이 어복리에 들었으니
사장-아무리
오장-정확에 삶은들 익을 줄이 있으랴.

삼장의 ‘굴삼려’는 삼려대부를 지낸 굴원을 일컫는 것이며, 굴삼려의 혼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있다는 것은 굴원의 멱라수 투신사실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다.
오장의 ‘정확’은 선생님의 책에 보면 ‘죄인을 삶아죽이던 큰 솥’이란 주석이 달려 있다. 행형제도는 지금보다 옛날이 더 무지막지했던 것 같다. 어쨌든.... 선생님은 “지금으로 치면 압력솥쯤 되는 솥”으로 이해하면 될 거라셨다.

이 노래는 세상 사람들에게 ‘굴원의 불멸성’을 역설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굴원같은 충신을 얕보는 사람들을 ‘어부’로 설정하고, 그들을 은근히 조롱한다. 이를테면 ‘고기낚아서 삶아 볼테면 삶아 봐! 익나?’와 같은 식이다. 그 어떤 강력 파워로도 충혼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불멸의 이순신’이 있다면 중국에는 ‘불멸의 굴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노래는 ‘초강’으로 시작하는, 즉 ‘두 자 머리’로 시작하므로, 두 글자로 11박을 끌기 어려우기까, 세 박을 덜어낸다. ‘두 자 머리’로 시작하는 노래는 대부분 평거가 많단다. 그러면 ‘두 자 머리’ 노래는 무조건 평거인가? 그건 아니란다. 온박으로 된 것도 평거가 있다. 그렇고 안 그렇고의 법칙? 알 수 없단다. 세상 모든 일을 우리는 법칙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고 싶겠지만, 사실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더 많다. 더욱이 중요한 것일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짙다. 그러니 법칙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기를 너무 즐기지 말자.

<초강>을 부를 때 포인트!
삼장, ‘어복리’를 발음할 때, ‘어복’의 ‘ㄱ’소리를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복’을 발음하고 아주 잠깐 발화를 멈추었다, ‘-리’를 발음하면 된다.
‘들었으니’에서 ‘었’의 ‘어’를 발성하는 방법: ‘어’가 (선생님 표현에 의하면)‘먹는 소리’여서는 안 된다! 먹는 소리란? 어둡고 무거운 소리? 숨을 탁 놓아버린 소리! 힘이 틱 빠진 소리!? 먹는 소리로 안 내기 위해서는 피아니시모로 발성하되 공력있게, 악보상으로는 90도 발성으로 되어 있지만 120도 발성처럼. ‘들었으니’에서 ‘들’을 한 숨에 소리내고, 새숨으로 ‘어’를 발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