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탄] '정가'의 숨은 역사를 알다

2009. 4. 21. 17:54왕초보 노래배우기


지난 유월 중순 경에 보았던 정가극 "황진이"에 대한 나름의 소감을 앞서 말한 적이 있다. 지식이 짧은 왕초보의 공연 스케치인지라 유용한 정보가 될만한 내용은 아니었고 더우기 내용 중에 왕초보다운 실수도 있었기에 여기서 그 내용을 정정하고, 공연 후 영송당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영송당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모두 옮기고 싶었으나 아직은 역량이 부족해서 일부분만 간략히 추려보았다. 후에 하나 둘 쓰게 되리라)


왕초보의 실수를 정정하고자

우선 왕초보의 실수는 이것이다. 지난 공연스케치에서 나는 "정가극 황진이에서 시조나 가사는 알아듣지 못했으나 가곡은 알아들을 수 있어 기뻤다"고 했는데 사실 극 "황진이"에서 가사는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이 창작 시조들이었고 가곡은 "태평가"를 원곡 그대로 불렀다고 한다. 시조와 가사를 듣는 귀가 없는 탓에 정가(가곡, 시조, 가사)로 이뤄진 극이라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 내가 못 알아들을 뿐 당연히 가사도 있었으리라 짐작했던 것이 나의 불찰이었다.

혹여 그 부분을 읽고 "공연 중에 가사가 있었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신 분들이 있었다면 다시 한번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아래에는 공연 후 영송당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중에 '정가'의 의미와 역사, 그리고 정가극 "황진이"의 의의와 나아갈 방향 등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정가극 황진이' 공연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정가극"이라는 말은 다소 낯선 것이었다. 공연 팜플렛을 통해 가곡, 시조, 가사를 '정가'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들로 이뤄진 극이 정가극인가보다 하고 짐작했다. 중고교 시절 시조나 가사를 음악시간이 아닌 국어시간에, 음악이 아닌 문학으로 배웠기 때문에 이것들이 문학작품이라는 인상이 강하긴 하지만 동시에 음악이기도 하다는 점이 낯설진 않다. 그런데 정가라는 말은 꽤 생소한데 그렇다면 '정가'란 무엇인가.

"정가"라는 말은 1970년대 말에 출판된 "월하정가선"에서 첫 선을 보였다. "월하정가선"이란 월하 김덕순 선생의 노래 모음집이다. 이 책은 당시 월하 선생을 인간문화재로 올리기 위해 월하 선생에 관한 문화재 조사를 하시던 김기수 선생이 월하 선생이 부른 노래를 모아 기록한 악보집으로 이 책이 "월하정가선"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후부터 이 책에 수록된 가곡을 '정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월하 선생이 1975년 경에 문화재가 되셨고 1979년 김기수 편저 정가집 나왔으니 '정가'라는 말은 태곳적부터 사용되었던 음악용어가 아니라 70년대 중반부터 사용된 말인 것이다. 이후 김기수 선생이 남창 백 곡, 여창 여든 여덟 곡을 묶어 펴낸 남창, 여창 가곡집 "백 선 여든 여덟 잎"이 지금의 국악중.고교 전신인 국악사 양성소에서 교재로 사용되면서 정가라는 말이 국악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월하정가선"이전에는 "정가"라는 말이 없었다. 가곡은 가곡이고 시조는 시조고, 가사는 가사였다. 그러나 정가 모음집을 교재로 배우고 있는 국악중.고생들의 적지 않은 수가 '정가'라는 말이 태곳적부터 있어온 줄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정가"를 배우기는 해도 정가의 의미나 유래까지는 배우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악계를 이끌어 갈 후학들에게 국악용어의 의미와 유래를 제대로 알리고 전하는 것, 이것은 사소한 일일 수도 있으나 이 사소한 일이 올바른 국악사를 이어가는 밑거름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송당 선생은 후학들에게 "정가"의 의미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에 대해 보다 깊이 알아보고 후학들에게 설명해주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향유층 구분 위해 '정악'과 '속악'으로 나눠

"정가(正歌)"의 의미를 풀어보면 '바른 음악'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음악(국악)에서 가곡, 시조, 가사만이 바른 음악, 제대로인 음악으로 평가되었던 것일까.

일제강점기 때 우리음악은 일제에 의해 '이왕직 아악부'라는 이름으로 특화가 되었다. '이왕직 아악부'란 '이씨 조선의 왕조들을 위한 음악 기관'이라는 뜻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폄하하기 위해 사용한 말로 조선을 '이조(이씨조선)'라고 했듯이 우리 음악을 '이왕가의 음악'라고 한 것이다.

"일부에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의 전통 음악들이 사라질 뻔 했던 것을 이왕직 아악부를 통해 존재케 해주었다며 일본인들을 굉장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이 이왕직 아악부에 있던 편종.편경 같은, 순정률에 의해 만들어 놓은 우리의 악기들을 깍아내 평균율화해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옛 악기들이 정말 옛날에 사용됐던 바로 그 악기냐 하는 것이 제대로 규명이 안되고 있는 상태다. 그래도 성균관 등에 좀 정확한 종경이 남아있을 거 같다고 보는데 그것을 식별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것이 훼손되고 사라지던 그 때에 우리나라 음악이나 문화를 아끼는 사람들은 우리 것을 지켜내겠다는 마음에서 '조양구락부'의 전신인 '대한정악원'을 조직했다. 이 조직은 당시 의식있는 사람들, 식자층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것으로 구성원의 특성상 이들 대부분은 우리 음악 중에서도 고상한 음악 쪽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지식층의 조직만이 아니라 조라치들이 소속되어 있는 군영, 또는 신청 등 기층민들의 조직도 있었다.

이들은 개성장사꾼들의 조직보다도 잘 조직되어 있어서 한번 사발통문이 내리면 면면촌촌에 다 있는 굿당을 통해 삼천리 방방곡곡에 전달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직의 사람들 대부분이 고을마다 다니며 종교적 의식행위들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무당, 박수들이었고, 또는 요리집 같은 곳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인지라 식자층에서는 이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자 하지 않았다. 기층민의 음악도 같은 조선의 음악이지만 식자층에서는 이들하고 함께 할 수가 없다며 "정악"과 "속악"이라는 말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속'이라는 말에는 대상을 깔보는 의미가 있지 않은가. 국악이 둘로 나뉘어서 서로 반목하게 됐으니 여기서부터 국악의 슬픈 역사가 시작된 거다."

우리나라에서 '악(樂)'이라는 말은 원래 "가무악(歌舞樂)", 즉 노래, 춤, 악기가 모두 '악'에 포함된 것으로 '가무악'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서양음악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악'이 아니고 악기만을 '악'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고 서양음악의 세력에 주눅들고 위축될대로 된 이왕직 아악부, 조선 장악원 출신의 식자층이 주축이 되어 우리 것을 지켜나가겠다고 "대한정악원"을 만들면서 "정악"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들은 서양 음악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양음악용어를 사용해 우리 음악을 서양악보화하여 후학에게 전했는데 후에 이 악보가 음악의 실제 소리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통의 '악'의 개념이 서양음악의 수용과정에서 악기 위주로 범위가 좁혀지면서 정악은 악기연주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김기수 선생에 의해 노래는 '노래 가(歌)'자를 써서 "정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정가"란 무엇일까라는 단순한 의문을 좇다보니 그 뒤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문화를 지키고자했던 안간힘이 있었다. 아픈 역사 속에서 우리 전통의 것이 변형,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그저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기보다는 원래의, 아니 보다 나은 모습을 갖도록 애쓰는 것이 힘든 역사를 견디고 살아낸 조상들에 대한 후손들의 역할이 아닐까. "정가"라는 말에 대해서도 말이다.


가곡의 묘미는 실제로 체험 해봐야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정가극을 보러 가면서 해마다 명절 때면 공연장이나 TV 등을 통해 많이 접할 수 있었던 마당극, 마당놀이처럼 정가극도 상류층이 즐기던 극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공연 전 팜플렛을 통해 정가(가곡, 시조, 가사)로 이뤄진 극이겠구나 짐작하면서 원래 이런 극이 옛부터 있었던 것일까, 있었는데 내가 너무 무관심해서 모르고 있던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상류층이 즐기던 극은 원래 없었다고 한다. 더우기 우리가 현재 '정가'라고 하는 음악들, 특히 가곡은 즐기는 음악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수신을 위한 음악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즉 가곡은 마당극처럼 공연을 통해 충족감을 얻는 노래가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부르고, 체험을 할 때에만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인 것이다.

그것이 '바를 정(正)'자가 붙는 정가나 정악인 것이다. 실제로 체험을 해봐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남이 하는 걸 봐가지고는 절대충족이 안되는 점, 이점이 바로 가곡의 묘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수신의 음악으로 극을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가곡 원곡을 그대로 사용하여 극을 만든다면 그건 이미 이 음악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곡의 음악적 가치를 생각해 볼 때 이러한 대단한 도전에 대한 욕구는 예술인에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청자의 입장에서도 스스로 해봐야만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을 본인이 직접 해볼 수 없다면 그 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향유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가곡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보다 폭넓게 향유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서 왕초보는 영송당 선생님께 조언을 구해본다.

"이 음악으로 극을 만들려면 (하나는) 모든 사람을 무대로 이끌어서 직접 노래를 해보라고 하고 음악도 타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가로 뮤지컬을 만들려고 한다면 뮤지컬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다 갖추면서 현재의 가곡과는 전혀 다르게 작곡을 해서, 가곡의 목으로 노래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곡의 목으로 판소리를 하는 식으로 '가곡풍의 음악극', '가곡 발성에 의한 음악극'으로 구성해야 한다."

정가극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갖고 계셨던 영송당 선생님은 '정가극 황진이'에서 느끼셨던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침체된 이 분야가 "황진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던져주려 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이 공연이 이 분야에 활기를 더욱 불어넣는 촉매역할을 해준다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 그러나 극 안에서 가곡 그대로를 불러서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 없다. 단지 처음 보는 거니까 신기하다는 것과 판소리의 지르는 소리보다는 좀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이런 점들은 이 극이 생존할만한 필요충분조건도 아니고 관객이 흡족해 할만한 것도 아니다.

가곡풍의 발성으로 새롭게 작곡한 가곡풍의 노래와 뮤지컬의 현대적인 요소들을 가미한 "가곡 발성에 의한 음악극"으로 꾸며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주제에 있어 황진이 자신의 철학과 그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시의 신분제도와 남녀차별에 대한 그녀의 태도 등을 통해 능력 있는 한 여자가 어떻게 남자들과 겨루면서 꿀림 없이, 여권신장을 해가면서 살았는지, 그리고 후대에 송도삼절이라고 불리며 이름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포인트를 맞추었다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