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탄] <버들은> 2

2009. 6. 29. 15:43왕초보 노래배우기

<왕초보 노래 배우기>의 왕초보님이 오랜만에 보내오신 글을 올립니다.
가곡 입문 시에 배우게 되는 <버들은>에 대한 이야기를 <제11탄>에 이어 써주셨습니다.
다소 긴 글이라 나누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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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마상청앵>

  이삭대엽 <버들은>은 영송당 문하에서 맨 처음 배우게 되는 노래이다. 가곡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발음, 발성, 호흡, 시김 등을 제대로 짚어 배울 수 있는 곡이 이삭대엽이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가곡전수관 홈페이지 www.igagok.org ‘음원자료실가곡과 시조’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는 기술적인, 그야말로 음악적 수련의 측면에서 합당한 설명이다. 왕초보는 조금 다른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버들은>이야말로 가곡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곡이라고 생각한다. 노랫말도 멋지고, 선율선과 곡의 구성도 아름답고 신비롭다.  그러므로 <버들은>을 한 번 접하게 되면 가곡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사실 왕초보들이 이 곡을 배우더라도 가곡 표현의 여러 가지 묘를 제대로 터득하기란 어렵다고 본다. 대신 가곡의 맛과 멋이랄 수 있는, 가곡의 무한한 음악성, 그것의 예술적 가치 등에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맛볼 수 있다.



<버들은> 노랫말-움직임을 품은 적막, 어두움을 안고 있는 밝음.

가곡은 정해진 몇 개의 선율선에 노랫말(시조)을 바꾸어 부르는 형태의 노래이므로 같은 곡이더라도 그에 붙여지는 노랫말을 음미하고 그 맛을 최대한 살려 표현하려 해야 한다는 것이 문학도로서 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노랫말의 자자구구 뜻을 풀어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요, 노랫말을 시 작품으로서 감상하는 일은 노래를 숙련하기에 앞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여
구십삼춘 짜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서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든고

봄은 어떤 계절인가? 얼어붙었던 대지가 풀리고, 검은 나무들에 파릇하게 물이 오른다. 해마다 봄나무들을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무엇보다 연두빛 물을 가장 먼저 피워 올리는 것은 버드나무이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들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고, 오동나무, 느티나무들은 봄이 무르익을 때서야 푸른 물을 뿜어 올리기 시작한다. 먼 산에 아련히 봄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할 때 동네 뒷산, 길가 어딘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들에서 봄 신호를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다.

“버들은 실이 되고” 정도가 되었으면 어느 정도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다. 지금은 버들가지 사이를 포롱포롱 날아다니는 꾀꼬리를 보기 어렵겠지만, 꼭 꾀꼬리가 아니어도 봄이면 연두빛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버들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꾀꼬리를 “꾀꼬리는 북이 되여”라고 읊었다. 나무와 새의 조화를 ‘실과 북’으로 바꾼 시적 상상력은 실로 절묘하다. 가만히 흔들거리기만 하는 나뭇가지는 움직이지 않는 날실로, 그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꾀꼬리는 날실 사이로 비유하여 정과 동, 음과 양을 하나의 이미지로 포착해 낸 것이다.

버들과 꾀꼬리를 실과 북으로 상상한 것으로 보아 이 시의 화자는 여성임에 틀림없다. 이 시조의 지은이는 알 수 없지만, 남성 작가이든, 여성 작가이든 이 시조는 여성적 정조를 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초장의 밝고 경쾌한 봄 풍경은 중장에서 그늘을 드리운다. 시적 화자는 시름을 안고 있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의 시름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봄이라는 계절이 환기하는 의미를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자연이 기지개를 켜고 약동했던 것과 같이 자연의 일부인 사람의 기운도 활기를 띠는 계절이 봄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봄다운 봄을 맞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훈훈한 대기에 감응해 나무에 물이 오르고, 물오른 나뭇가지 사이를 꾀꼬리가 날아다니는데, 이 여인은 짝 없이 봄 내내 베틀질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 더더욱 자신의 우울과 고독이 더 확대되어 느껴졌던 것은 아닌지?

“구십삼춘”은 봄의 석 달, 90일을 말한다. 90일 동안 짠 피륙을 한 번 상상해 보자. 얼마나 길고 길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짜내느니 나의 시름”이란 표현은 매우 놀라운 표현이다. 시적 화자의 절실함과 그 절실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름이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마음의 무게이며 어둠일 터인데, 그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낸 표현이기 때문이다. 버들과 꾀꼬리를 실과 북으로 상상했던 독창적인 상상력이 중장으로까지 이어져 시적 화자의 시름 가득한 내면을 피륙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구서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든고?”라고 노래한 종장은 절로 이해된다. 이것을 해역하면 ‘누가 꽃보다 녹음이 낫다고 했는가’쯤이 된다. 꽃은 쉬이 피고 쉬이 진다. 꽃대궐을 이루던 봄 천지는 어느 날 봄비가 한 번 내리고 나면 너무도 허망하게 꽃이 순식간에 지어버려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래서 찰나적인 꽃보다 지속적인 녹음이 낫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시는 봄에 대한 이와 같은 일반론을 뒤집고자 한다.

종장을 지금 식으로 바꾸어 보면 “누가 녹음이 꽃보다 낫다고 했어?”쯤 될 터이고, 이 말은 “나는 꽃이 더 낫다”라는 뜻을 말하기 위한 설의적 표현이다. ‘꽃이 더 낫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녹음이 꽃보다 낫다’는 주장을 가볍게 원망함으로써 자신이 꽃이라는 주장과 함께 꽃으로 활짝 피지 못한 상황에 대한 시름을 투정부리듯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름 가득한 이 봄이 길게 이어지지 않고, 빨리 다른 계절로 바뀌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이 시조는 시적 화자의 소망은 존재하되, 그 소망과 직접 연결된 대상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해서 가벼운 갈망이고, 가벼운 시름이며, 가벼운 원망(怨望)을 담고 있는 시가 되었다. ‘경박하다’는 의미에서의 가벼움이 아니라 ‘밝다’는 의미에서의 가벼움이라 할 것이다. 이 시의 밝음은 대놓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잔잔함과 마음 한 켠의 어두움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정서적 균형감으로 인해 약간의 무거움을 품고 있는 밝음이며, 약간의 동요가 느껴지는 고요함이라고 할 것이다.


악보로 알 수 없는 소리의 빛깔과 무게

이런 노랫말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 <버들은>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영송당 선생님의 비법을 옮겨 본다. 그것은 선생님 소리의 빛깔과 무게와 두께와 결.... 등등의 표현법일 터인데, 그것은 악보를 통해서는 잘 알 수가 없고, 선생님의 해타를 경험해 봐야지만 가능하다. 소리의 결과 질감을 언어로 바꾸어 설명하는 일은 어렵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불완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송당 선생님께서는 이 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신 것 같다. 그래서 ‘왕초보’의 작업은 한결 수월하다. 또 그 때문에 <왕초보 노래 배우기>가 시도되었다. 선생님의 수업 내용을 잘 녹취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므로. 그리고 그 일은 후학 중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