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의거기념음악회] 나눌수록 즐거운 악(樂)

2010. 4. 3. 18:53풍류방이야기


4월 2일 금요일. 어김없이 모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은 3.15의거 50주년기념음악회 <새날을 여는 겨레의 노래>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공연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많이 와주셨는데, 특히 멀리 서울과 제주도에서 오신 이삼스님과 송인길 선생님의 깜짝 공연이 '느닷없는 행복'을 선사하기도 했지요. 

경남대 사학과 유장근 교수님의 소개로 사학과 동아리 동아시아지역사료연구회 학생들도 대거 참석해 간만에 '젊은 피'를 대거 수혈해 주셨고요. 서익진 교수님과 하효선 선생님도 오셨습니다. 하효선 선생님은 2주째 개근하고 계신데 스탬프라도 찍어드리고 싶어요. >.<;; 다음 공연때 또 보자고 눈도장 찍고 가셨고요. 

허정도 선생님도 오셔서 오랜만에 뵐 수 있었습니다. 참 그리고 3.15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도 빼놓을 수 없지요. 또 늘 빠짐없이 와주시는 관객분들과 마산시보에 난 기사를 보고 씩씩하게 혼자 찾아오신 여자 관객분도 계시고요. 다들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 풍류방을 만들었답니다. 

특별히 이번 공연에는 포도와 토마토도 준비해 보았어요. (우측 상단) 색을 고려한 배치의 예술이 보이시나요? 가곡전수관 이모님이 신경써서 예술적으로 셋팅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걸 보면서 헝클어버리고 싶어서 혼났는데 뭔가 너무 질서정연해서 약간 비틀어버리고 싶은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새로 구입한 그릇 받침과 차, 떡, 과일이 놓여지니 (우측 하단) 보기에 그럴 듯 합니다. 듣기엔 맛도 아주 좋았다고 해요.

   

공연이 시작됩니다.
지난주 국립국악원 '다담' 공연 유인물을 보니 "손 뻗으면 닿을 공연장"이란 표현이 있더군요. 우면당을 이야기하는 건데, 300석 규모입니다. 이런 문구는 30석 규모도 안되는 저희 풍류방에 딱이죠. 보시는 것처럼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들릴 공간입니다. 지난 '새날을 여는 겨레의 노래' 1회 공연과 마찬가지로 천년만세를 시작으로 가곡, 가사, 시조, 대금 독주 등의 곡이 이어졌습니다.



흔들흔들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드는 분, 심취해 계신 분, 열심히 찍으시는 분, 따라부르시는 분... 다양한 관객들의 모습을 포착해 보았습니다.



중간 중간 영송당 조순자 명인(가곡전수관장)의 해설이 곁들여져 여느 공연장 같은 딱딱한 분위기는 없어요. 가끔 던지시는 관장님의 유머도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 입니다.



지난 서울 공연이 끝나고 내려오는 계단에 발을 삐끗하신 관장님은 이번 공연에 깁스를 하고 나오셨습니다. 사고 당시에는 조금 풀어주면 낫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심각해 마산에 돌아와 잠시 입원해 계실 정도였어요. 빨리 쾌차하시길 빌어주세요.  



관장님의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느닷없는 행복' 추첨은 연주단 가인들이 맡아주었습니다. 참석한 관객이 많았던 만큼 많은 경쟁을 뚫고 느닷없이 '행복'을 거머쥔 분들입니다.




참석하신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께 한 말씀 들어보았습니다. 
백한기 회장님은 "누군가에게 '3.15의거기념사업회 회장입니다' 하니 '데모대장이네'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는 말로 운을 떼셨습니다. 3.15의거를 여전히 데모 정도의 수준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느꼈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또 백회장님은 "3.15 기념 사업 중 이런 정가 공연을 기획한 조순자 선생님의 의도를 공연에 직접 와보고 많이 느끼게 됐다"고 하시면서 "가곡 공연은 처음 보는데, 호흡이 아주 긴 노래인 듯 하다. 3.15 의거의 정신 역시 호흡을 길게 하고 가져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덧붙여 본인도 가곡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4월 10일부터 가곡전수관 성악/ 기악 강좌가 시작되니 참고해 주십시오. ^^;;   




공연이 끝난 후 멀리서 오신 이삼스님과 송인길 선생님의 연주를 들려달라 청하니 두 분이 나오셔서 연주를 들려주셨습니다. 이삼스님은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을 못쓰게 되신 후 왼쪽 손만으로 대금을 부시는데요.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예능 보유자셨던 녹성 김성진(1916~1996) 선생님께 대금을 사사받으셨답니다.

한쪽 손으로(그것도 왼손으로!) 대금을 연주하시는 것은 물론, 못만드는 악기도 없으시데요. 이번에 전수관에 오시면서도 직접 만드신 대금 2개를 선물로 두고 가셨습니다. 이삼스님이 부시는 대금은 한 손으로 불 수 있게끔 고안된 대금(좌측 하단)이라는데요. 양 손 다 이용해도 불기 힘든 대금을 왼손으로 직접 만들고 불기까지 하시니 입이 떡 벌어질 일입니다. 또 가야금을 연주하신 송인길 선생님은 오랫동안 국립국악원에 계신데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을 하셨으니 두 분의 연주는 정말 돈 주고도 못볼 귀한 공연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두 분으로 인하여, 단원들이 바짝 긴장했었다는 후문입니다.  




특별공연까지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은 분들과 함께 단체 사진도 찍었습니다.


★ 관객 소감
▲ 최대의 감동, 최고의 느낌
▲ 신선함? 참 좋았습니다~ 편안히 눈 감고 명상하는 마음으로 즐겼으면 더 좋았을텐데 처음 와보는 자리인지라  촌놈 서울 구경온 듯 두리번거리다 공연이 끝나 아쉬웠어요.
▲ 오늘 뜻깊은 시간 가질 수 있게 좋은 공연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접해본 것이라 새로웠고 국악을 배워 나도 이런 무대에 서보고 싶습니다.
▲ 신기하다.
▲ 정말 감동적이고 가곡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 홍보를 더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가인분들이 내는 목소리가 가장 인상 깊었고, 멋있었다.
▲ 책으로만 보았던 가사와 시조를 음악으로 들을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 열심히 정진해서 크게 이루시길 바랍니다.
▲ 가곡을 알게 되어서 좋았고 훌륭하다는 점을 잘 알게 되었다.
▲ 3.15의거 정신은 반드시 계승해야 한다는 약속이며 가곡이 가슴에 와닿는 선율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진다.


1부 공연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글은 금요풍류의 하이라이트인 2부 '나눔' 시간에 함께 한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생생한 느낌을 전하고자 속기로 적은 것을 거의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혹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참석하신 분들이 댓글로 수정되어야 할 부분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2010. 4. 2. 새날을 여는 겨레의 노래

함께 나누는 이야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흔적을 남겨"


유장근(경남대 사학과 교수, 이하 유장근)
(이삼스님께) 어떤 연유로 왼손으로 대금 연주를 하시게 된 건 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삼스님
사고 후 대금을 가르치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 하고 왼손으로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과거에 했던 걸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왼손으로 대금 연주한 지가 8년째인데, 오른손보다 10배는 더 노력해야 합니다.
유장근(경남대 사학과 교수)
그럼 8년 불면 스님처럼 불 수 있는지... (웃음)
이삼스님
10년은 불어야 기초가 닦여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 다른 악기도 다 10년은 해야 기초는 땠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지요. (웃음)
우리 음악은 자연이랑 똑같습니다. 산능선이 흐르는 것처럼 음의 흐름이 그렇습니다. 연결이 물 흐르듯 유유히 이어져야 해요. 우리 음악은 서양음악처럼 단계별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대금의 경우 많은 음을 높이고 낮추고 하는 것은 손가락으로 하지만, 조금씩 음낮이를 조절하는 건 취법이 되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숨이 가빠서 대금을 잘 불수가 없었어요.
단소도 초등학생들이 불고 하니까 쉽다고 생각하는데, 잘 불려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거문고도 중심인 단전에서 힘을 끌어 모아야 확실한 소리가 나요.
영송당 조순자(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 가곡전수관장, 이하 영송당)
기를 담아야 하니까요. 기를 손끝으로 해서 내보내야 하지요. 머리 아파서 아무도 안하려고 하겠습니다. (일동 웃음) 중요한 것은 근~이 있어야지요. 유장~하게 근~이 있어야. (일동 웃음)
유장근
영광입니다.
영송당
일부러 해외(제주도)에서 여기까지 구경 오신 송인길 선생님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송인길
3.15의거기념 공연이 있다고 해서 오늘 꼭 구경해야 한다고 해서 같이 왔습니다.
유장근
제주도에서도 공연 하십니까?
송인길
공연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조선생님 모시고 공연 한번 해야지요. 발이 나으시면...(일동 웃음)
영송당
오늘 특별히 경남대 학생들이 늦게까지 자리를 함께 했는데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주세요.



김명섭(경남대 사학과/ 대학생)
안녕하세요. 저는 사학과 동아시아지역사료연구회 회장 김명섭입니다. 공연을 보면서 궁금한 게 있었는데 노래를 부를 때 ‘ㅐ’와 ‘ㅔ’를 ㅏ, ㅣ 와 ㅓ, ㅣ로 나누어 부르던데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영송당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되었을 때 'ㅔ'는 중모음이었습니다.  'ㅔ'가 단모음이 된 것은 조선시대 후반부터였습니다. 모든 존재했던 것들이 없어질 땐 어딘가에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요, 둘이요, 셋이요, 넷이요 하는 말을 하나요, 둘이요, 서이요, 너이요 라고 하는 것도 그 흔적이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현대에 와서 고치치 않은 이유가 있어요. ‘ㅔ’를 길게 하면 그냥 얇은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장음을 할 때는 초출과 재출만으로 발음합니다. 초출인 ‘ㅗ, ㅏ, ㅜ, ㅓ, ㅡ, ㅣ’를 발음하고 초출과 ‘ㅣ’가 결합된 재출인 ‘ㅛ, ㅑ, ㅠ, ㅕ’는 중모음이지만 바로 발음하는 것이지요. 천(天), 지(地), 인(人)을 따서 만든 모음의 3요소 ․ , ㅡ, ㅣ로 만든 순수모음 ‘ㅗ, ㅏ, ㅜ, ㅓ, ㅡ, ㅣ’는 길게 발음해도 귀에 거슬리지 않지만, 혀나 입술이 닿아서 생기는 닿소리는 오랜 시간 발음하면 귀에 거슬리고 그 음빛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곡은 순수모음 ‘ㅗ, ㅏ, ㅜ, ㅓ, ㅡ, ㅣ’로 발성하는 발음의 원칙이 있습니다.

가곡은 발음법, 발성법이 굉장히 정교한 성악곡
그래서 가곡은 세계인들이 한국어를 몰라도 다들 좋아해요. 순수모음은 부담감을 주지 않거든요. 가곡의 음역은 여자가 엘토에서 메조소프라노 사이, 남자가 바리톤 정도인데 이게 전세계 사람들의 80%가 가지고 있는 음역이라고 합니다. 음성을 들을 때 부담감이 없어요. 세지 않고 부드러운 소리입니다. 계단식으로 가지 않고 유장~하게 근~이 있는 (일동 웃음) 목소리로 가기 때문입니다. 문화권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아름다움은 똑같이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오페라나 조수미 노래를 처음 들어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누군가는 ‘태평가’를 부를 때 ‘태’를 ‘타-이’라고 부른다고 무슨 중국말이냐 하는데, 가곡은 발음법, 발성법이 굉장히 정교하게 짜여 있어요. 노랫말도 그것에 맞게 당위성 있게 들어가 있습니다. 창자(唱者)가 풀어서 부르더라도 단어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단성장(語短聲長)이라고 해서 자음은 짧게 하고 모음은 길게 발음해서 가사 전달을 정확하게 합니다.

노랫말이 잘 전달되어야 성악곡이라 할 수 있지 노랫말이 전달되지 않으면 기악곡이에요. 자음은 분명하고, 모음은 부드럽게 발음하면서 우리말의 초성, 중성, 종성을 분명하게 해주면서 노랫말을 전달하는 겁니다. 오늘 관객으로도 오신 최천희 선생이 ‘논개’를 오페라로 만드는데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가 하나같이 노랫말 전달이 안됐다는 거예요. 종성발음을 다 떼버려서 그런건데, 외국어에는 종성발음이 없으니까 외국에서 주로 유학한 사람들이 노래 부를 때 종성발음을 못하게 된 겁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쌀'을 '살'로 발음하는 걸 못 고치듯이 말이에요.
이해가 좀 되셨어요? 또 다른 질문은 없나요?
도경 이종록(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이하 도경)
회장이 했으니 이제 총무가 질문할 차례 아닌가요?
총무
...


도경
그럼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역사 공부는 왜 하게 되었지요?
총무
고등학교 때 그림공부를 하면서 한국 미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그러고 나서 자연스럽게 사학과를 가게 되었습니다. 
 
도경
그럼 당신은 왜 시조를 부릅니까? 하고 질문이 나와야지요. (일동 웃음)
제가 예전에 방송국에서 취재 와서 한 질문에 얼버무린 대답이 하나 있는데, 그분들이 그게 명답이라고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한 질문이 왜 당신은 이런 케케묵은 단조로운 소리를 애들에게 가르치려 하냐는 것이었어요.

제가 그때 한 대답이 자, 두 친구 있다고 생각합시다. 한 사람은 잘 살아서 고급 아파트에 살고, 한 사람은 못살아서 오두막집에 산다고 쳐요. 그런데 후자인 친구가 잘 사는 친구 집 거실이 넓어서 좋다, 뭐가 좋다 이런 얘기만 하면 자기 정체성이 없어지는 거예요. 대신 자기 오두막집에 싸리문도 만들고 조롱박도 달고, 봉숭아도 심고 하면 잘사는 친구가 와서 싸리문 앞에서 사진도 찍고 조롱박으로 물도 떠먹어 보고 합니다.

우리 것에서 보람과 행복 느끼는 게 필요
우리는 서양에 뭐뭐 부럽고, 따라하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해버리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져요. 우리 것에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게 필요하지요. 취재했던 분을 우연히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 그 이야기를 잊지 못한다고 얘기해요.

우리 지역에도 그렇지만 대단한 가수 와서 공연할라치면 1천만원 줬다, 5백만원 줬다 그럽니다. 예기 악기편에는 “예야자(禮也者)는 보야(報也), 악야자(樂也者)는 시야(施也)”라는 말이 나와요. 악은 베푸는 것이에요. 공연 가서 노래 부르는 저 사람 얼마짜리야 하는 그런 식은 안됩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를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2천년 전에 유대인들이 뿔뿌리 흩어질 때 자기 나라의 ‘흙’을 한 보자기 싸서 갔데요.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갈 때 다른 것 하나 안가지고 그 흙보자기 하나만 들고 갔답니다. 세계 유명한 사람의 30%가 유대인이래요. 이 유대인들은 어느 지역에 살던지 반드시 하루 1시간씩 유대인 역사를 배웁니다. 매일 1시간씩 말입니다. 역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는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요즘 배우는 거 컴퓨터 치면 다 나와요. 그런데도 사회는 계속 안좋은 방향으로만 갑니다. 선조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역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엄마 품 속처럼 편안한 우리 음악
얼마 전 미혼모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보니 동사무소에 상담사를 둬야 된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그게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어요. 한데 이건 근본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저수지에 물이 새면 들어가는 쪽에서 막아야 하는데 나오는 쪽에서 막고 있는 격이에요. 뉴스에 보니 22살 먹은 여자가 칼로 아이를 찔렀다는 게 나와요.

머리는 발달했는데 가슴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따뜻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이런 걸 해야 합니다. 우리 피, 우리 뼈에 각인돼 있는 걸 해야 합니다. 엄마 품 속이 얼마나 좋아요? 젖 안먹어도 편하잖아요? 이런 걸 안해서 그럽니다. 엄마 품속이 아니고 다른 아줌마 품에서는 과자를 주면 안기기는 해도 마음은 발버둥을 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마음을 다스려 주는 것, 따뜻하게 해주는 것을 해야 해요. 생각은 놀부, 마음은 흥부를 만든다는 말처럼 말로만은 안되요.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이런 거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영송당
사람의 마음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움직이게 하는 게 바로 음악입니다. 고운 소리를 듣고 하다보면 마음도 같이 고와짐을 느낄 수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다음번 공연에 남은 이야기들을 마저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여기서 마칩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