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탄] 기다림의 미학을 말하다 -언약이(1)

2009. 12. 18. 12:38왕초보 노래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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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노래배우기] 제16탄 언약이

 평조 이삭대엽과 계면조 이삭대엽의 선율 진행의 차이는 세모시와 거친 베에 비유할 수 있다. 평조 이삭대엽은 탁임종으로 시작해서 차근차근 태까지 올리는 선율선의 진행을 보이는데, 계면조는 시작부터 탁중려로 살짝 숙였다가 탁임종을 흘러내려 황종으로, 황종에서  중려로 성큼 뛰는 선율의 진행을 보인다. 이처럼 평조의 선율은 차근차근, 촘촘하게 음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반면, 계면조의 선율은 듬성듬성, 거뜬거뜬 음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악보로만 보아도 평조는 한 정간에 많은 음들이 나타나지만, 계면조의 경우는 평조에 비교해 볼 때 음이 성기게 나타난다. 따라서 차근차근 기초를 다지듯이 진행하는 평조의 선율과 달리 도약 진행이 많은 계면의 선율은 음을 치켜 올리는 폭이 강해서 오히려 목 쓰기가 편하다. 부르기 쉽다고 초심자가 계면조부터 하게 되면 후에 평조의 섬세한 짜임새로 이루어진 음들을 표현하는 데 애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영송당의 문하에서 가곡을 배울 때 가장 어려운 평조 이삭대엽부터 시작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세모시를 짜는 기술을 먼저 익힌 사람에게 거친 베를 짜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거친 베를 짜는 기술을 먼저 익힌 사람이 세모시를 짜는 일은 그리 수월하지는 않을 터이다.

<언약이> 노랫말: 말의 절약과 흐트러짐 없는 기다림의 자세

시조는 짧은 시로서, 시상의 압축과 비약이 많다. 그러니 그 노랫말과 시상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시어와 시어 사이, 시행과 시행의 행간에 생략된 말과 정황들을 상상적으로 보완하며 감상해야만 시의 맛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조가 ‘가곡’이란 지극히 느린 곡조로 불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 듯하다. 압축된 간결한 시를 천천히 맛보기 위함이리라. <언약이>는 <버들은>과 달리 표현상 특별히 절묘한 비유나 기발한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시조는 아니다. 다만 시적 화자의 솔직한 심경을, 지극히 절약한 최소의 언어를 통해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생략된 정황을 감상자가 상상적으로 보완해야만 이 시조가 표현하고자 하는 시적 진실에 닿을 수 있게 된다.

언약(言約)이 늦어가니 정매화(庭梅花)도 다 지거다
아침에 우든 까치 유신(有信)타 하랴마는
그러나 경중아미(鏡中蛾眉)를 다스려 볼가 하노라.

“언약이 늦어가니”는 시적 화자가 누군가와 했던 언약이 이행되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설명적인 표현이다. 이 시조 전체를 통해 그 언약이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내용은 끝내 알 수 없다. 그러니 이를 상상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다. 연인들의 언약으로 상상하든, 군신의 언약으로 상상하든 자유이다. 숙종 때에 동동지를 지낸 박희서라는 작자에 의해 창작된 시조라는 점으로 미루어 군신의 언약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하다. 연군지정(戀君之情)을 노래하기 위하여 남성 작가들이 여성 화자라는 페르조나(가면)를 활용했던 것이 조선조의 문학적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군신의 언약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적 언약으로도 공적 언약으로도 읽힐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이 시조에서는 애초부터 허용되어 있다는 뜻이다.

“정매화도 다 지거다”를 통해 그 무슨 언약이었든지 간에 그 언약은 봄까지는 이루어지는 것으로 약속이 되었든지, 아니면 봄까지는 이루어지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니 ‘뜰에 핀 매화가 다 지었구나’라고 화자의 가벼운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아침에 우든 까치 유신(有信)타 하랴마는” 속설에 아침에 집 앞의 나무에서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이 온다고 했다. 그런데 “우든 까치”라고 했고, “유신타 하랴마는”이라고 했으므로 시적 화자는 아침에 까치 울음소리를 들었고,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 오는가 했는데 결과적으로 반가운 소식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유신타 하랴마는”의 다음에 할 수 있는 말들은 생략되어 있다.

초장이 화자의 기다림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면, 중장은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림의 나날이 어떤 양상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즉 초장과 중장을 연결해서 읽어 본다면 아침에 눈을 떠서 까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행여나 소식이 올까 설렘과 실망이 교차하는 나날을 계절이 바뀌도록 지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기다리는 소식은 아직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화도 날 것이고, 지치기도 할 것이고, 기다림을 그만 두고도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조의 화자는 끝내 기다림을 단념하지 않는다. 

종장 “그러나 경중아미를 다스려 볼가 하노라”에서 “그러나”는 많은 것을 함축한다. ‘소식이 올지도 모르므로’ 혹은 ‘소식이 오지 않는다 해도’ 등등. 어떤 경우이든 간에 언약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지 않고는 ‘경중아미를 다스린다는’ 여인의 수신의 자세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의 아름다운 눈썹’을 뜻하는 ‘경중아미’는 단지 여인의 외양으로 한정해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거울’은 자신을 비추는 물건으로서, 반성의 뜻을 환기하는 모티프일 뿐만 아니라, “경중아미를 다스려”라고 했으므로 “다스려”라는 술어와의 연접이 “아미”보다는, ‘마음’과 더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수신(修身)에서 身이 단지 몸이 아닌 것처럼, “아미”는 단지 여인의 얼굴을 제유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모두 아우르는 표현일 것이다. ‘경중아미를 다스리는 일’을 단지 얼굴을 치장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시조는 너무도 속된 뜻만 환기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반면 흐트러짐 없는 기다림의 자세를 일깨우는 것으로 읽는다면 이 시조는 기다림의 윤리를, 기다림의 미학을 강조하는 차원으로 승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