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의 새벽편지] 가곡 조순자 명인을 아시나요?

2009. 11. 9. 14:59사랑방이야기

2주 전쯤 저희 영송당 관장님께서 서울에 다녀오셨습니다. 서울에 간 일인즉, 오는 11월 15일(일) 오후 3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리는 "명사, 명인을 만나다" 세 번째 공연 때문인데요. '명사, 명인을 만나다'는 '국립국악원의 새로운 해설공연시리즈'라 해서 9월부터 11월까지 무(舞)의 한성준, 악(樂)의 지영희, 가(歌)의 하규일 선생님을 소개하는 공연입니다.

영송당 관장님이 맡으신  선가 하규일 선생님 시간에는 한국 노동운동계의 거목이시며,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셨고 현재 (사)인간의 대지 이사장이기도 하신 이태복 선생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2주 전의 서울행은 바로 이태복 선생님과의 사전 만남을 위해 가신 길이었습니다. 두 분은 처음 만난 자리인데도 서로의 이야기에 깊게 공감하셨다고 합니다. 영송당 관장님은 이태복 선생님을 뵙고 오셔서 "이런 분이 계셔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구나"라고 느끼셨답니다. 또 "아주 좋은 분을 만나 서울을 오고 간 일이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어요.

이태복 선생님 역시 관장님과의 만남이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으셨나 봅니다. 이태복 선생님이 약 7만여명의 지인들에게 보내신다는 11월 5일자 "이태복의 새벽편지"에는 관장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태복의 새벽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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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조순자 명인을 아시나요?
얼마 전 가까운 분들과 격의 없는 자리에서 노래부르기를 강요당해 할 수 없이 한곡 불렀다. 4월 혁명 때 쓰러져간 젊은 넋들을 기리는 이영도 시조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노랫말과 곡이 좋아 즐겨 부른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로 시작되는 노랫말을 곡조 따라 부르면 저절로 갑갑하던 마음이 풀리고 가슴을 펴게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노래 분위기가 애잔해서 인지 투지가 일어나기보다 눈물이 고여오는 경우가 많다.
70년대 민중가요에 비해 80년대 노래는 진취적이고 행진곡 풍의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시대상황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하지만 90년대 접어들어 자연스럽게 퇴조되면서 2천년대에 들어와서는 기념식이나 옛동지들과의 추억의 자리에서나 듣게 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힙합 풍의 노래와 춤들도 그런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민중가요나 가곡들은 우리세대가 학교교육과 방송, 공연 등 문화환경이 서양 음악의 압도적 영향 하에서 전파되어 익숙하게 된 것들이다. 초등학교에 가서 맨 처음 배우는 애국가에서부터 중고등학교의 음악시간에 배운 한국의 가곡이나 서양노래, 각종 대중적인 공연 등을 통해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되고 입에 붙어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짬을 내어 명상을 할 때 이 익숙한 곡들이 오히려 방해가 돼서 국악의 명상곡을 듣는다. 또 성당에서 국악미사시간이 되면 마음이 편해지고 잊었던 고향의 정서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양음악이 전부인 것처럼 배우고 들어서 그게 음악인줄 알지만, 누군가 깨우는 사람이 있어 손짓을 하면 저 깊은 곳에서 깨어나 스멀스멀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외롭고 어렵지만, 그렇게 깨우는 사람이 가곡명인 조순자 선생이다. 마산에서 가곡 전수관을 운영하며 전국의 음악현장에서 국악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 대다수 국민들이 이 ‘가곡’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운 금강산’이나 ‘산유화’ 같은 서양곡조의 가곡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가곡명인은 그럼 무엇을 말하는가. 국악 가운데 가사, 시조가 형식에서 비교적 자유스러운 반면 가곡은 전문적인 수련을 쌓은 사람, 즉 가객이 부르는 절제된 음악이다. 이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에 오른 분들을 가곡명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부도 이들이 쌓은 경지를 높이 평가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분들이 생활고에 허덕이거나 기능전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면 전통문화 전승에 대한 정부정책이 겉돌고 있거나 시늉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문화의 본말이 전도된 한심한 현상이 아주 굳어져 정신적 예속과 노예화가 심화될지 모른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무시하고 무조건 전통고수만을 외치는 수구적인 태도도 문제지만, 자신의 전통과 문화에 무식한 상태에서 어떻게 창조와 발전이 가능하겠는가? 최근에 와서 건축학과에 한국건축을 몇시간 배우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음악시간이나 음대는 여전히 서양음악을 우리음악처럼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러니 국민들의 국악상식은 궁. 상. 각. 치. 우. 라는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 정부가 편성한 음악관련 예산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국악관련 예산은 그마저도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문화와 예술을 무시하고 외면한 채 ‘국가상표(브랜드)’를 높인다고 기구까지 만들어 요란을 떠는 것을 보면 정말 ‘얼’이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중국하면 ‘경극’, 일본하면 ‘가부끼’가 떠오르고 그곳을 방문하면 반드시 구경하고 싶어한다. 한국에는 그런 전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 상징(아이콘)이 정립돼있지 못하다. 우리 스스로 제 것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데 어떻게 전세계에 한국의 브랜드를 알리겠는가.
마산의 한 귀퉁이에서 모욕당하고 있는 한국가곡의 현실을 상징하듯 비좁은 서양식 건물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가곡명인 조순자 선생께 격려와 위로를 드리면서 국립국악원에서 만남을 고대한다.

※ 이태복 선생님의 공식 홈페이지
http://www.leetaebok.pe.kr/home/letter/

가곡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말 중 '아양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양지계는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대가의 예술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양지계는 높은 경지의 예술가와 그의 예술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인물들 간의 만남, 즉 대가들의 만남을 의미하는 말이라 할 수 있는데요.
영송당 관장님과 이태복 선생님의 만남이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고로~ 이번 국립국악원의 "명사, 명인을 만나다" 마지막 공연을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