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탄] 서양음악은 공간의 음악, 우리음악은 시간의 음악

2009. 4. 21. 17:41왕초보 노래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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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 중 한 장면.


영화 <서편제>를 보면 아버지가 딸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데, 부녀가 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아버지-스승이 선창을 하고 딸-제자가 따라 부른다. 제자의 소리가 성에 차지 않은 스승은 ‘그것이 아니고, 이렇게’ 하면서 시범을 보이고, 제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그러기를 되풀이 한다. 그들 사이에 악보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귀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몸-악기로 그 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 음악은 진정 ‘귀’의 음악인 것이다. 그렇기에 ‘귀명창’이란 재밌는 말도 있지 않은가.


몸에 익은 소리를 하라

영송당께서도 말씀하신다. “악보를 보지 말고 나를 보고 하도록 하세요.” 물론 선생님의 ‘손시김’을 보고 따라 하라는 말씀이시지만, 악보를 보느라 시각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소리에 정신을 모으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본다. 선생님께서 보여주는 ‘손시김’은 다름 아니라 소리(장단과 소리의 흐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귀에 익고, 몸에 익은 소리를 하라는 말씀이신 것 같다.

영송당께서는 그래서 음악 전공자들에게는 악보 없이 가르치신다고 하셨다. 우리같은 비전공, 왕초보들은 악보 없으면 워낙 감을 못 잡으므로 그리 안 하신다고 하셨다. 나도 요즘 녹음한 것을 주로 반복해 들으며 연습한다. 그저 앵무새처럼 따라하기만 하는 수준이지만.
“귀가 중시되지 않는 음악도 있나?”라고 반문을 품으실 분도 혹 있으시리라. 나도 영송당의 설명을 듣기 전에 그런 반문을 품었으므로.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의 차이에 대한 영송당의 설명을 듣고 나면 우리음악이 더 귀하고, 본원적이라 생각될 것이다. 영송당의 음악에 대한 설명은 독특하게도 ‘문명과 자연 차이’에서 시작된다. 선생님의 패미니스트다운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

서양음악은 높낮이가 중요하고, 우리음악은 길고짧음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람을 말할 때는 ‘남녀’라 하나, 짐승을 말할 때는 ‘암수’라 한다. 서열상 중요한 것이 앞에 온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본능, 생명의 차원에서는 ‘암’이 먼저고 ‘수’는 다음이다. 우리의 언어 관습 속에서 ‘어머니, 아버지’라 하지, ‘아버지, 어머니’라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거슬러 재배열, 서열화하면서 문명을 이루었다. 음악의 경우도 그렇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시간예술이므로 음악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시간, 즉 길고짧음이다. 소리의 높낮이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위치이다.

서양음악이 화성의 음악이라면, 우리음악은 장단의 음악이다. 이 점 역시 서양음악이 시각의 음악이며, 우리음악이 청각의 음악이란 사실을 잘 말해준다. 달리 말해 ‘서양음악은 공간적’, ‘우리음악은 시간적’이라 할 수 있다. ‘음’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위치(공간)이며, 더욱이 여러 개의 음을 쌓아서 동시에 울리게 하는 ‘화성’은 시간성을 거스르고자 하는 어떤 욕망에 의해 시각적, 공간적이 된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음악에 음을 동시에 쌓는 다성악을 지향하게 된 시초를 이루는 것은 바하이다. 바하의 음악적 고안은 또한 근대 기획와 묘하게 일치한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일정하지가 않다. 마음대로 변조(조바꿈)가 가능하다. 자기통제, 인간통제, 사회통제라는 큰 틀에 움직이던 근대 초기, 바하는 음의 간격을 균일하게 절분하여 평균율을 만들고, 스펙터클하고 강력한 음악을 만들기 위하여 화성이 강조된 웅장한 음악을 고안했던 것이다.

작은 실내악으로는 많은 사람을 동시에 한꺼번에 움직일 수 없으므로 큰 오케스트레이션이 동원된 음악, 파이프 올겐 등과 같이 큰 소리를 한꺼번에 울리는 음악이 필요했던 것이다. 원래 오페라도 리릭하던 것이 점점 스펙터클한 것으로 바뀌어 갔던 것도 이와 때를 함께한다. 그런 음악의 시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서양음악계에선 본연의 소리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니, 이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를 한번 음미해 볼 만하지 않은가.


아무도 오지 않는 밤, 나를 달래다 <산촌에>

영송당께서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것이 있는데, 평조 이삭대엽 그것도 <버들은>이다. 이 노래는 일분 이십정간으로 나같은 왕초보는 숨이 짧아서 제대로 부를 수가 없다. 중간중간 소위 ‘도둑숨’(원래 숨을 쉬어서는 안되는 대목이지만, 발음이 바뀔 때 표 안나게 살짝 쉬는 숨)은 물론 도둑숨도 허용되지 않는 부분에서 숨을 쉬다 노래의 흐름을 놓치기도 하고, 숨을 쉬어야 하는 대목에서 “흡흡”하는 소리를 낼 정도로 숨을 마셔서 영송당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선생님은 늘 대놓고 꾸짖지 않으시고,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게 우리의 기괴한 소리를 흉내내신다. 그러면서 “누가 ‘흡흡’ 이러라고 했어요?” 그러면 ‘도둑이 제 발 절이는’ 식으로 우리 중 범인이 바로 자수를 하게 되어 있다.

“<버들은>을 부르면 다른 노래는 저절로 된다.” 그 말을 여태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런데 배우는 노래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버들은>이 더 안 되는 듯하다. 도리 없지. 그저 묵묵히 연습하거나, 태평스레 그 어느 날을 기다릴밖에.....내가 <버들은>의 진통 효능을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날숨을 가늘고 길게 뽑는 호흡법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호흡을 가늘고 길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마음도 진정되고 건강도 좋아진단다. 이 긴 호흡이 바로 노래의 기본 아니겠는가? 그래서 <버들은>이 되면 다른 노래는 절로 될 수밖에. 또 하나, 평조의 목은 계단을 차근차근 오르는 듯한, 그래서 기본이 되는 목이란다. 그와 대조적으로 계면목은 확 올라가는 목이란다.

계면조 중거-<산촌에>

산촌에 밤이 드니 먼 데 개 지저온다.
시비를 열고 보니 하늘이 차고 달이로다.
저 개야 공산 잠든 달을 지저 무삼하리오.


시적 화자는 산촌 깊은 곳에 있다. 개 짖는 소리에 시비를 열어보는 것을 보니 누구를 기다린 모양이다. 누군가 “계십니까?”라고 소리하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개 짖는 소리에 대문간으로 달려 간 것을 보니 그는 꽤나 외로웠던 모양이다. 근데 문을 열고 보니 아무도 없다. “하늘이 차고”는 계절적 배경-가을을 말하는 것이기 하지만 시적 화자의 외로움을 말하는 심리적 계절을 말하기도 한다. 문 밖 텅 빈 공간, 덩그렇게 떠있는 달은 어떨까. 소름끼치게 차가운 달도, 방긋 웃는 부드러운 달도 아닐 것이다. 그저 무심한 달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그래서 시적 화자는 그 무덤덤한 달을 “공산 잠든 달”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종장에선 ‘저 개야 아무도 안 왔는데 왜 짖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디 개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던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아무도 안 올 텐데 내가 왜 이러지. 신경 끄고 들어가 잠이나 자자.’ 쯤으로 자신을 달래는 말이다.


"레이저로 끊듯이?"

1) ‘산촌에’ 3음절을 11박에 거쳐 부른다. 더욱이 ‘산촌’의 ‘산초’를 첫 박에 발음하고, ‘촌’의 모음 ‘오’를 늘여서 2박에, 2박의 마무리 끝 부분에서 ‘촌’의 받침 ‘ㄴ’을 분명히 발음한 뒤, ‘에’라는 조사를 유장하게 늘여 부를 대목으로 이어진다. 4박 시작하면서 ‘어’를 바짝 끊어, 선생님 표현에 의하면 “레이저로 끊듯이” 끊고, ‘어’를 이어 부른다. “레이저로 끊듯이?”
얼마 전에 <이블 레지던트>라는 허접한 영화를 봤는데, “레이저로 끊듯”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통제 시스템의 중심부로 가는 통로에 갇힌 특수요원들을 향해 레이전 광선이 다가와 지나간다. 처음엔 가로로 한 줄, 다음엔 촘촘한 서너 줄이, 그 다음엔 바둑판 모양의 선이. 그 선이 사람의 몸을 통과한 뒤 사람들의 몸은 정확하게 선 모양대로 깔끔하게(?) 두 동강, 네 동강, 바둑판 모양으로 절단되어 나뒹게 된다. 광선이 지나갔던 자리는 아무 표도 없다. 다만 작은 자극이라도 주어진다면 광선이 통과한 자리는 여지없이 말끔한 절단면을 드러내며 분할된다. 분할되기 전에 그것들은 절단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산촌에”의 “에”모음을 다듬어서 길게 늘이기 전에 아주 짧고 단단한 긴장을 표현해야 하는 대목을 영송당은 “레이저로 끊듯이”라고 표현해 주셨다. 너무도 적확한 표현! 훗훗 웃음이 나올 지경이네.

2) 5장 “잠든 달을”에서 “잠든”의 ‘드’를 요성으로 흘러 내린 다음, ‘ㄴ’을 부르고, 쉬고, “달”을 소리낼 때, “(달―)하는 소리를 철퍼덕 내려 놓으면 안 된다, 마치 요요할 때 추를 살짝 내려 놓았다 다시 확 잡아당기듯 소리해야 한다.” 그 ‘달--’의 율명은 ‘태(겉목)림(속목)’이다. 철퍼덕 내려 놓는 소리란 겉소리와 속소리를 함께 내는 이상한 창법이라고 하셨다. (소리를 글로 적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기표를 미끄러져 가는 실재들) 이로 미루어 보아 ‘겉목 태’의 ‘다’를 소리낼 때도 훅 내지르듯이 크게 하지 말고 살짝 가볍게 하되 겉목을 확실히 구사하면서 그 다음 ‘속목 림’의 소리를 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3) 계면 노래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끊는 목’이다. 이것이 바로 평조의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듯한 목과 확실히 구별되는 지점. 2장 “지저온다”에서의 “오--”, 3장 “하늘이 차고”에서의 “고--”, 5장 “지저무삼”에서의 “무--” 등의 ?남황중?의 소리.
황을 전성으로 치키다가 확 올라가면서 중을 바짝 조여서 끊어야 한다. 이와 달리 평조의 끊는 목은 '남'을 기둥 삼아, 그 소리를 짚고 '태'로 올라가는 형국.